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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천주교인이오?” prologus.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위기 상황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 리 스 도 오 상 회

 

 

PROLOGUS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위기 상황

 

(Français,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deed.en)

2020년 대림1주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개막하며, 그 표어를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로 정했다. 이는 조선의 한 관장이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1846년,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스무 번째 옥중 서한에 이렇게 적었다.

해변에 이르자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면서 관가로 끌고 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심문하기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천주를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이는 참으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시의적절한 질문이다. 이제는 천주교를 믿는다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다시금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는 조금씩 늘어나는 영세자 수와는 반대로, 지속적인 주일 미사 참례율의 하락세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다.) 천주교에 관심이 생겨 입교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나 정작 그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나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발길을 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제 성소도, 수도 성소도, 현저히 줄어만 가고 있다. 가톨릭신문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전한다.

그간 총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1999년 8.3%에서 2018년 11.1%로 매년 약 0.1%p씩 늘어났다. 하지만 기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인 주일미사 참례율은 1999년 29.5%에서 2018년 18.3%로 10%p 이상 떨어졌다. 신자 비율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신자의 의무인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비율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추세다.

 

이러한 와중에 신자들의 신앙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예컨대 미국 교회의 경우,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성체와 성혈이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잘못 이해하는 신자가 69%나 되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로 범위를 좁혀도, 축성된 성체와 성혈이 실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라고 믿는 신자는 63%밖에 되지 않았다.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 하더라도 37%나 되는 신자들이, 성체성사 안에 예수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교의 중 하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신앙

 

한국 교회에는 신앙 실태에 관한 통계 자료가 없지만,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인들 역시 교리를 제대로 모르거나, 교리에 반하는 오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가톨릭교회 안에 오류가 계속해서 침투하고 또 이단이 나타났다고는 하나, 그럴 때마다 교황과 주교들은 종도[각주:1]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을 수호하며 교회를 오류로부터 보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상황을 유달리 ‘신앙의 위기’로 간주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오류를 쫓아내지 못한 채 그 오류에 교계 제도 전체가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계 곳곳의 사제들, 주교들과 추기경들까지도,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이단으로 단죄당할만한 오류들을 방임하거나, 되려 버젓이 가르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예시는 ‘무차별주의’(indifferentism)이다. 근래에 시복 시성 운동이 벌어져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정도로 한국 교회 안에서 큰 존경을 받아온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1년 4월 27일 TV 프로그램 <도올의 논어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우리 교회로서는 하느님 아니라도, 불교 신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속하니까 안 된다’든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를 믿든지 다른 종교를 믿든지, 하여튼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주신다….

 

원주교구의 박용식 시몬 신부 또한 2010년 10월 29일, 한국 교회 공식 언론인 CPBC의 코너 <박용식 신부의 예수님 흉내내기> 제39화에서 말했다.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구호는 광신자들이나 정신이상자들의 헛소리이고, 자신의 교회에 대한 과대광고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실을 그르치는 협박, 공갈이고 위협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고 하느님께 대한 훼손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서울대교구 홍성남 마태오 신부도 제작년 CPBC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말했다.

만약에 우리 아나운서님이 손님을 초대하고 싶다고 해요. 그런데 오는 손님들 중에, 가톨릭 신자인데 사기를 많이 쳐, 거짓말도 많이 해, 도둑질도 해, 범죄 전력도 있어, 이런 가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인데 선행을 정말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를 부르고 싶을까요? (어우, 당연히 후자죠.) 그렇죠! 그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도 ‘야, 천주교 신자들만 천당 들어오고 불교 니들은 저리로 가.’ 이렇게 하실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거죠. 또 하느님 입장에서도 똑같이, 천당이라는 것은 하느님 자비에 초대받아 가는 데잖아요. 당연히 하느님께서도 그러면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선행을 하는 사람을 부르지, ‘아 저 영세받았는데요? 저 하느님을 믿고 살았는데요?’ 이렇게 했다 그래서 불러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그래서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말 하느님의 뜻,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한국 천주교의 고위 성직자부터 일개 사제까지, 공식 교회 언론을 통해 아무렇지 않게 전파하는 바, 천주께서는 사람이 천주교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착하게만 산다면 다 구원해주신다고 하는 이 무차별주의 이념은, 천주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명백한 오류이다. 진리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코는 아무도 성부께 나아오지 못하나니라. (요왕 복음[각주:2] 제14장 6절)

 

초대 교황이신 성 베드로 종도 역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령(救靈) 즉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

다른 어떤 이를 말미암아 구령하지 못하나니, 대저 우리가 마땅히 구령하기 위하여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주신 것이 없음이니라. (종도행전[각주:3] 제4장 12절)

 

이에 따라, 김대건 신부와 같은 시대에 계셨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 1832년에 무차별주의를 분명한 언어로 규탄하셨다.

이제 본인은 현재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또 다른 풍부한 원천을 고려하는 바, 바로 무차별주의이다. 도덕성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어떤 종교를 고백하든간에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경한 자들의 사기로 말미암아 이 비뚤어진 의견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각주:4]

 

가까운 미래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치명[각주:5]하기 직전, 김대건 신부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천주 성자, 역대 교황 성하들, 그리고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까지 이토록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음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은 무차별주의 오류를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이 천주교 신앙에 위배되는 오류를 버젓이 가르치는 탓에,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그리고 또 무엇을 실천해야할지 완전히 혼란스럽게 되었다.

 

 

사태의 원인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쩌다가 교회가 이렇게 되었나? 1980년대 말, 프랑스의 故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저술한 「혼란스러워 하는 천주교인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Open Letter to Confused Catholics)을 읽어보면, 이러한 위기는 이미 반세기도 더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천주교인들이 혼란에 처해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는 것을 납득하려거든 지난 2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을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할 길이 분명했습니다. 사람은 신앙을 갖거나, 잃거나, 아예 갖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앙을 가진 사람, 곧 영세를 통해 교회에 입교하고, 열두 살 무렵에 성세[각주:6] 서약을 갱신하여 견진 날에 성신[각주:7]을 받은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 기막힌 발언을 듣고, 항상 가르쳐 왔던 것과 반대되는 것들을 읽으며, 정신에 의심이 기어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이러한 현상을 초래했는가?’ 하고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 신앙은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확신이 뒤집히니 혼란이 초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는 천주교야 말로 유일한 진리의 종교라고 가르쳤고, 신자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실상,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작품인 반면 천주교는 천주께서 직접 세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거짓된 종교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 거짓된 종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종교로 데려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전히 진리입니까? 실로 그러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었던 것일 뿐입니다. 어떠한 새로운 사실도, 어떠한 신학적이고 과학적인 발견도(‘신학적인 발견’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천주교를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 아닌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각주:8]

 

1974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오늘날 위기의 원인을 꽤 분명하게 지목했다. 충격적이게도,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천주교 신앙 및 이 신앙을 보호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통의 수호자인 가톨릭 로마를, 지혜와 진리의 주인인 영원한 로마를 굳게 고수한다. 반면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및 그로부터 발생한 공의회 이후의 모든 개혁들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 新근대주의 및 新개신교 경향의 로마를 따르길 항상 거부해왔다. …… 우리 구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교회와 천주교 교리에 충실한 유일한 자세는 이러한 개혁을 받아들이길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환상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장을 접한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은, 어떻게 공의회가 교회와 신앙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공의회란 본디 교황의 권위로 이단을 단죄하고, 교의(dogma) 즉 천주교인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신앙의 진리를 확정적으로 정의하며, 이를 장엄교도권으로 선언하기에 오류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공의회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新근대주의”에 “新개신교”라고 비난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먼저 분명한 사실을 하나 지적해야 하겠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 스무 차례의 세계 공의회들과는 달리 무류성이 행사되지 않았다. 교황은 어떠한 오류를 이단으로 단죄하지도 않았고, 교의를 확정적으로 정의하지도 않았으며, 장엄교도권으로 선언하지도 않았다. 이는 공의회가 폐막한지 한 달 뒤인 1966년 1월 12일 일반 알현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직접 밝힌 사실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천주교 교리의 완전한 유기적 체계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천주교 교리는 공의회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공의회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거나 실질적으로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 이 공의회의 사목적 성질을 고려할 때, 이 공의회는 장엄한 방식 안에서 무류성의 기색이 있다고 여겨지는 교의를 천명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그 가르침을 최고 통상교도권의 권위로 제공했으며, 이는 개별 문헌의 본성과 목적에 관련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유순하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통상적이면서도 아주 명백하게 정확한 교도권입니다.

 

하지만 무류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여 그것이 반드시 오류가 있다는 뜻은 또 아니지 않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오류라도 범했단 말인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근 몇십 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것이 좋았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쇄신해냈고, 공의회 이후로는 교회에 따스한 봄날이 찾아왔다는 막연한 환상에 우리 모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의회가 폐막된지 불과 7년 뒤, 바오로 6세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되었다. 1972년 6월 29일 바오로 6세의 강론에 관한 교황청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교황 성하께서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언급하시면서, “어떤 틈으로 사탄의 연기가 천주의 성전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의심, 불확실성, 문제, 불안, 불만,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난 7월에 세 명의 경제학자 곧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배로(Robert Barro), 옥스퍼드 대학의 에드가드 디와잇(Edgard Dewitte), 채프먼 대학의 로렌스 아이나콘(Laurence Iannaccone)이 전미경제연구소(NBER)를 통해 발표한 연구 논문, “회고적 관점 : 66개국의 장기 종교 예식 참여”(Looking Backward: Long-Term Religious Service Attendance in 66 Countries)에 따르면,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은 타 교파에 비해 전 세계 가톨릭 신자 참석률의 감소를 초래했다.”[각주:9]

1962년과 1965년 사이, 약 3천 명의 주교와 신학자, 수도회의 장상들은 바티칸에 모여 가톨릭 교리의 현황과 근대성과의 관계를 논의했다. 이 공의회에서 기인한, 예상치 못했던 주요 개혁들은 (라틴어로만 거행되는 미사의 종식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가톨릭 신앙과 실천에 몹시나 영향을 미쳤다. 이에 사회학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제도화된 종교가 변화를 겪게 되는 데 있어, 종교개혁 이후 가장 의미심장한 사례”(Wilde [2007, p. 2])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미국(Gihleb and Giuntella [2017])과 유럽(Berman, et al. [2018])의 수도자 감소와 관련이 있지만 전세계 가톨릭교도들의 종교 예식 참석에 미친 결과는 아직 추정되지 않았다.

이벤트 스터디 연구법을 사용함으로, 대개 가톨릭 국가들의 종교 예식 참석률은 다른 모든 국가와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에 비교하여 정확히 제2차 바티칸의 여파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했음이 밝혀졌다. …… 종합적으로, 가톨릭의 비교적 참석률은 1965년과 2015년 사이 10년에 4퍼센트 씩 떨어졌다.[각주:10]

 

 

연속성의 해석학?

 

하지만, 꼭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다고 해야만 할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상황이 나빠졌다고 해서, 기대했던 좋은 날들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공의회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을까? “어떤 틈으로 사탄의 연기가 천주의 성전에 들어왔다”라고 말한 바로 그때, 바오로 6세는 이렇게 부연했다.

우리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세상에 왔고, 그 존재 때문에 교회가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자각을 되찾았다는 기쁨의 찬가를 터뜨리지 못하게 하고, 세계 공의회의 결실을 훼방하고 질식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80년대에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공의회 이후 교회에 초래된 혼란은 공의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세속의 그릇된 이념들과 더불어 공의회를 잘못 이해한 이른바 “공의회 反정신”(Konzils-Un-geist)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공의회는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을 이룬다는 그의 ‘연속성의 해석학’이란 바로 이런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공의회에 뒤따른 결과는 모든 이들, 처음에는 요한 23세, 나중에는 바오로 6세의 기대와 잔인하게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 교황들과 공의회 교부들은 새로운 가톨릭 일치를 기대했지만, 이와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6세의 말씀을 빌리자면 자기비판에서 자기파괴로 넘어간 것처럼 보이는 불일치를 향해 나아갔다. …… 나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겪은 피해가 “참된” 공의회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 잠복한 공격적이고 분권적인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외부적으로는 서구의 문화 혁명, 곧 “제3기의 새로운 부르주아”인 상위 중산층의 주장과 더불어 개인주의, 합리주의, 쾌락주의 유형의 그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이념으로 인한 것이다.

…… 이미 공의회 회기 때부터는 물론이요 그 이후에도 더욱, 거짓된 “공의회 정신”, 그 진정한 “反정신”이 공의회 정신에 그 자체로 대립했다. 이 파괴적인 공의회 反정신에 따르면, 새롭다면(또는 새롭다고 추정되는 것이라면.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대의 이단들이 참신한 것으로 제시되었는지!)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전에 있었던 것이나 지금 있는 것보다 좋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외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바로 그 외부의 문제가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反정신이 아니라 진정한 공의회의 정신 그 자체가 기여했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하게도 교회 위기의 외부적 원인을 고려하고 싶다. 특히 사회에, 심지어 그리스도교 사회에까지 퍼져 나간 자유주의적이고 쾌락 추구적인 정신에 대해서 말이다. 제2차 바티칸은 이에 맞서기 위해 한 게 정확히 무엇인가? 없다! 반대로 제2차 바티칸은 오로지 그 방향을 향해 부추기기만 했다! 비유를 들어 보리라. 위협적인 해일에 직면한 네덜란드 정부가 어느 날 충격을 피하기 위해 둑을 열었다면 어떨까. 나라가 완전히 물에 잠긴 뒤에 “우리는 이 상황에 책임이 없습니다. 해일 때문이었으니까요!”라고 변명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제 이것이 바로 공의회가 한 일이다. 공의회는 세상에 대해 개방될 것을 선언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로써, 反정신이 아니라 공의회 그 자체인 사목헌장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Gaudium et Spes)로써, 세상의 정신 앞에 전통의 장벽을 열어 젖혔다.[각주:11]


이쯤에서 어떤 사람들은 ‘잠깐, 아무리 그래도 르페브르 대주교의 입장은 너무 극단적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약삭빠른 누군가는 ‘르페브르? 그 사람은 파문당했잖아! 어떻게 그런 사람의 생각을 인용할 수 있지?’ 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반대는 절대 다수의 천주교인들에게 굉장히 낯선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소위 ‘보수파’로 통하는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내비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예컨대 카자흐스탄의 아타나시우스 슈나이더 보좌주교의 경우, 일찍이 2017년 로라테 첼리와의 인터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회의 및 베네딕토 16세의 연속성의 해석학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제2차 바티칸은 교황이 주도한 적법한 회의였으며 우리는 반드시 공의회에 대한 존경의 태도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전통 전체와 변함 없는 교도권에 기초하여 몇몇 구체적인 항목들에 대해 근거가 충분한 의심을 표하거나 존경을 담아서 개선을 제안하는 것이 금지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후대 교도권적 진술의 정확성에 대해 검증하는 데에 있어, 수세기에 달하는 시기 동안의 교도권의 전통적이고 지속적인 교리적 진술들이 우선권을 지니며 또 기준으로 여겨집니다. 교도권의 새로운 진술은 반드시 원칙에 따라 더 정밀하고 더 분명해야 하지만, 결코 모호해서는 안 되며 이전 교도권의 진술과 겉보기에 대조되어서도 안 됩니다.

…… 제2차 바티칸의 새로운 진술들 중 몇몇은 (예컨대 콜레지알리타스, 종교 자유, 에큐메니컬한 종교 간 대화, 세상을 향한 태도) 확정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교도권의 전통적이고 지속적인 진술들과 겉보기에 또 진실로 조화되지 않습니다. …… ‘연속성의 해석학’ 원칙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설득력도 없고, 가톨릭 신앙의 불변하는 진리와 그 구체적인 적용에 대해 더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강제적인 해석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성추문 은폐를 폭로해 이름을 알린 前 주미 교황대사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의 경우, 더 나아가 2020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가 참 교회에 대립되는 거짓 교회를 만들어 거대한 분파를 초래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렇듯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에 대해 회의하거나 비판하는 보수파 고위 성직자들이 없지 않다.

 

 

공의회를 고발하라

 

그렇다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왜 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오늘날 교회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는가? 오늘날 천주교 신앙의 위기에 대해서 대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어떤 혐의가 있는가? 아니, 잠시만, 아무리 사목적 공의회였다고 하지만, 어쨌든 세계 공의회가 아닌가? 교황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자리에 뭐 그리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슈나이더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반대자들이 짚어내는 부분들을 제법 잘 짚었다. 특히 에큐메니즘과 종교 자유가 그것이다. 이는 르페브르 대주교 역시 공통적으로 주된 비판을 가한 공의회의 가르침들이다. 공의회를 고발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가톨릭교회는 지난 2천 년 간 이런 것들을 가르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단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저 스물 한 번째 세계 공의회가 갑자기 이런 오류들을 허용하고 선언함으로써 오늘날의 교회에 위기가 닥쳤다는 것이다.

 

공의회를 고발한다는 것이 분명 내키는 일이 될 수 없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주교들 외에도 사제와 신학자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책임을 돌리고 있으니,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며, 도대체 오늘날 교회의 위기와 어떤 연관을 갖는가? 공의회에 대한 고발이 사실이라면, 왜 교황과 주교들은 그것을 묵인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사안을 살펴본 뒤에 우리는 진정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질문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인가?

 


 

  1. 사도. [본문으로]
  2. 요한 복음서. [본문으로]
  3. 사도행전. [본문으로]
  4. Pope Gregory XVI, Encyclical Mirari Vos, 13. [본문으로]
  5. 순교. [본문으로]
  6. 세례. [본문으로]
  7. 성령. [본문으로]
  8. Marcel Lefebvre, Open Letter to Confused Catholics, chapter 1. [본문으로]
  9. Barro et al. [2025]. [본문으로]
  10. Barro et al. [2025, p. 5-6]. [본문으로]
  11. Marcel Lefebvre, They Have Uncrowned Him [Angelus Press, 1994], chapter XXXII.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