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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천주교인이오?” II. 강도 공의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 리 스 도 오 상 회



II
강도 공의회

 

Lothar Wolleh,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deed.en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의 총 스무 차례의 세계 공의회는 대부분 교회와 세상의 오류를 단죄하고 교정하며, 무류한 권위로 반드시 믿어야 하는 교리, 즉 교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스물 한 차례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어떠한 오류도 명시적으로 단죄하지 않았고, 무류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오늘날의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회가 근현대 세계에 “적응”(aggiornamento)해야 한다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한 론칼리의 의도였으며, 공의회를 이어 받은 교황 바오로 6세, 즉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의도였다.

 

공의회 도중인 1964년, 교황 몬티니는 회칙 Ecclesiam Suam을 통해,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해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단지 신앙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확실히,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통해서 상속받은 진리와 은총의 보화를 보존하고 수호해야 한다. 성 바오로 종도가 “그대에게 맡긴 재보를 보전할지니라”(티모테오 전서 제6장 20절)라고 하였듯이 말이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보존도, 수호도, 교회가 받은 은사에 관한 교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의 깊은 본성은 타인에게 확장되고 타인에게 공유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종도들에게 내리신 마지막 명령으로서 “이러므로 너희는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마테오 복음 제28장 19절) 하신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종도’라는 단어는 벗어날 수 없는 사명을 암시한다.

애덕의 외적인 은사 안에서의 표출을 추구하는 이러한 내적인 추진력에 대해, 우리는 ‘대화’라는 단어를 적용할 것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대화에 들어가야만 한다. 교회는 말을 걸어야 하고, 메세지를 건네야 하고, 소통을 해야 한다.[각주:1]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가르치라 하시며 명령하신 선교는 일방적인 행위다. 하지만 대화는 상호작용으로서, 이 두 가지 개념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이미 교황 프란치스코가 “대화에 관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아이디어와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타당하며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길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분명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바오로 6세는 서로 모순되는 선교대화라는 개념을 서로 합침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대화하는 것으로 선교를 재정의했다.

 

일찍이 론칼리가 공의회를 개막하며 연설하기를, “교회는 단죄하기보다 자기 가르침의 유효성을 입증함으로써 오늘날의 필요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의미는 바오로 6세에 의해 분명해진다. 교회는 더 이상 현대 세계의 오류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이제 오류와 대화를 할 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의 혁명

 

근대주의자들의 주장과 흡사해보이는 론칼리와 몬티니의 의도는, 공의회 동안 근대주의자들이 지지받음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언급했다시피, 론칼리는 라너, 스힐레베이크스, 큉, 콩가르, 드 뤼박 등의 新근대주의자들이 공의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

 

특히 콩가르는 개신교 학자들과 꾸준히 교류했던 자로서, 교회를 비판하고 열교를 칭송하는 데 많은 열정을 할애하다 로마로부터 계속해서 경고와 제재를 받았던 자였다. 그에 대한 가톨릭신문의 기사는 (비록 찬사하고자 하는 의도지만) 콩가르의 내역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브 콩가르는 …… 루터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베를린, 바르트부르크, 엘푸르트, 빗덴베르그 등지에서 루터를 탐구하였다. 빠리에서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이해하게 되었고 …… 한편 1936년 1월 일치주간에 행한 특강이 큰 반향을 불러왔다. 모든 그리스도교파들이 그의 과감한 교회비판과 타교파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대하여 경악했던 것이다.

…… 1939년에 그는 그의 스승 셔뉘 신부와 함께 「분열된 그리스도교도」(1937)때문에 로마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 1947년에는 앞서 말한 「분열된 그리스도교도」(1937)와 「교회신비의 탐구」(1941)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책들이 비가톨릭교파에 대하여 너무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 제네바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준비를 위한 가톨릭의 입장이란 글이 저지당하였고 그 이듬해 (1948)결성키로 된 wcc에 옵서버를 보낼 준비도 저지 당하였다. 1950년 「교회안에서의 진짜 개혁과 가짜 개혁」(1950)을 출판한일로 인하여 로마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었다.

…… 이후로 그는 극도로 조심하면서 외적 활동을 자제하다가 195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행한 루터에 관한 강연이 로마에 고발되었고 「교회안에서의 진짜 개혁과 가짜 개혁」(1950)은 재판이 금지되었다. 1952년부터는 일체의 논문뿐만 아니라 사소한 서평까지도 사전검열에서 저지되었고 …… 빠리에 소환되어 보니 셔뉘, 페레, 봐슬로 신부들이 콩가르 신부와 함께 활동금지를 당하였다. …… 1954년에서 55년까지 석달동안 로마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연말에 귀국하여 스트라스부르그 수도원에 거주제한으로 있으면서 소규모의 사제 활동밖에는 할수 없었다.

 

콩가르는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고, 저지당하고, 또 저지당하고,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히고, 고발당하고, 금지당하고, 검열당하고, 금지당하고, 추방당하기 일쑤였다. 그의 이단적인 신학에 관한 문제를 제외하고 오로지 이런 부분만 똑 떼어놓고 본다면, 마치 부당한 독재 권력에 희생당한 영웅이라도 되는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콩가르는 검사성성 건물 벽에 두 번이나 오줌을 쌀 정도로 영웅적이었다!

 

론칼리는 이러한 신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와 같은 이단 측의 인사들을 공의회에 참관인으로 모시길 원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사무국’을 설립하고, 초대 국장으로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을 임명했다. 

 

베아 추기경은 어떤 인물이었나? 당시 타임지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공의회 도중 한 교부가 모든 교부들에게 反근대주의 선서를 제안했을 때, 베아 추기경은 반대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공의회 중앙위원회 회담에서, 한 고위 성직자는 모든 주교들이 공의회에 대해 니케아 신경과 근대주의 이단 반대 선서로 구성된 공식적인 선서를 제안했다. …… 베아는 저항했다. 다른 대다수의 성직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공의회 가운데 근대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처음에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분명히,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과 같은 이들로 대표되는, 교회가 이제껏 가르쳐온 신앙과 전통을 지키려는 교부들 역시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어떻게 보면 소수였고, 대다수의 교부들은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2년 10월 30일에 있었던 사건은 공의회가 점차 근대주의자들에게 휘둘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공의회 회기 도중, 공의회가 가져오려는 전례적 변화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전통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눈이 좋지 않아 대본 없이 연설하느라, 교부 개인에게 할당된 시간인 10분을 넘겨버렸다. 15분째가 되어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연설이 끝나지 않자, 의장이었던 베르나르두스 알프링크 추기경은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마이크를 꺼버렸다.

 

그야 할당된 시간을 넘겼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자리로 돌아갔을 때, 교부들 가운데서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공의회의 참관인으로 앉은 이단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 세인트 피터즈버그 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의회에 참석한 비가톨릭 참관인들은 추기경들 사이의 사건과 공의회 교부들의 박수갈채를 호평했다. 공의회에서 있었던 민주적인 절차와 표현의 자유에 그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실로, “교회 권위는 민주적인 형태를 갖춰야 한다”는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이 빛을 발한 순간이 아니면 무엇이었겠는가?

 

 

공의회에서 통과된 에큐메니즘과 자유주의 오류

 

공의회 가운데 근대주의자들이 우세하면서,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부들이 흔들렸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제랄도 지 프로엔사 시가우드 대주교, 안토니우 지 카스트루 마예르 주교 등 전통주의 교부들 역시 ‘교부들의 국제 모임’(Coetus Internationalis Patrum)을 조직하여 근대주의 세력의 공세에 대응해보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공의회는 그들의 영향을 여실히 받게 되었다.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신학 자문위원이자 정통 교리의 옹호자였던 조셉 클리포드 펜튼 몬시뇰(Msgr. Joseph Clifford Fenton)은, 공의회 도중에 작성한 일기에서 이러한 영향에 대한 자신의 당혹감을 솔직히 드러냈다.

나는 전례에 관한 자료를 읽기 시작했는데, 나쁜 신학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실제로 멍청하게도 교회가 ‘simul humanam et divininam, visibilem et invisibilem’(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고,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이라 하는 것으로 족한다. 또 그들은 교회가 ‘quousque unum ovile fiat et unus pastor’(하나의 양떼, 하나의 목자가 있을 때까지) 일한다고 말한다. 마치 그러한 조건이 애진작에 달성된 바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1962년 10월 19일)[각주:2]
에큐메니즘에 대한 부분은 웃기는 소리다. 꼭 19세기 문헌이나 좌파 잡지에 실린 이류 기고문 같이 읽힌다. (1965년 10월 28일) …… 공의회가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과 비그리스도교 종교에 관한 것을 취하도록 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1965년 11월 26일)[각주:3]

 

이러한 펜튼 몬시뇰의 당혹감을 이해하려거든, 에큐메니즘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황들께서 일관되이 가르치신 바와 결과적으로 공의회에서 통과된 가르침을 대조해 보아야 한다.

 

에큐메니즘 운동이란,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의 무수한 분파, 교파들이 서로의 교리적 차이를 내려 놓고 화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1920년 1월 1일, 동방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르마노스 5세(Germanus V of Constantinople)는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Unto the Churches of Christ Everywhere)라는 회칙을 발표하여 에큐메니즘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그로부터 8년 뒤인 1928년,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정반대의 회칙 Mortalium Animos를 반포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반포하신 새 법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몇몇 사람들은 비슷한 목적을 추구한다. 이들은 종교적 감각이 결여된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확실시하기 때문에, 비록 각국이 특정 종교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영적 생활의 공통된 기반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특정 교리들을 공언하는 데 있어 형제로서 큰 어려움 없이 동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그 믿음 위에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사람들에 의하여 대회, 회담, 강연 등이 곧잘 소집되며, 여기에는 수많은 청중들이 참석하고, 모든 종류의 불신자들,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불행히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갔거나 완고하고 집요하게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성과 사명을 부인하는 사람들까지 하여 모든 이들이 어떠한 구별도 없이 논의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 모든 종교가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감각, 우리를 신에게로 이끌고 신의 통치를 순종적으로 인정하도록 이끄는 그 감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나타내므로 그 모든 종교가 다소간에 선하고 찬사받을만 하다고 여기는 그릇된 의견에 기초하고 있는 그러한 시도들을, 확실하게도 천주교인들은 결코 승인할 수 없다. 이러한 의견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오류에 빠져 속아 넘어갈 뿐만 아니라, 참된 종교의 개념을 왜곡하고 또 참된 종교를 거절하고, 이른바 자연주의와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들에게로 조금씩 빗겨 나가게 된다. 이로부터 그 이론들을 고수하고 또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신성하게 묵시된 종교를 유기하는 것임이 명백하게 뒤따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치를 기르는 문제가 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선함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

…… 이러한 시도는 많은 곳에서 수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듯 매우 능동적으로 장려된다. 심지어 매우 많은 천주교인들의 정신을 사로 잡아 자모이신 성 교회의 열망에 부합하게 될 그러한 일치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매혹한다. 교회는 실로 오류를 범하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품에 되돌리는 것보다 더 마음에 두는 일이 없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감언이설과 아첨 밑에는 천주교 신덕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하는 지극히 중대한 오류가 숨어 있다.

…… 경애하올 형제들이여, 이에 어찌하여 이 종도좌가 그 아래 있는 자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는 자들의 집회에 자리하길 결코 허락하지 않았는지 명백하다. 그리스도인의 일치라 함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하나인 참된 교회로부터 과거에 불행히도 떠나가 분리된 자들이 교회로 되돌아오도록 장려함으로써만 촉진될 수 있기에 그러하다. 만인에게 가시적이며 그 창시자의 의지에 따라 정확히 그분께서 제정하신 것과 동일하게 남아 있을 그리스도의 하나이요 참된 교회로 말이다.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정배는 결코 오염된 적도 없고 미래에도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치쁘리아누스가 증언한 대로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신의 신랑에게 그르칠 수 없다. 그녀는 부패하지 않고 또 정숙하다. 그녀는 오로지 하나의 처소만을 알고, 정결하고 정숙하게 혼인 침실의 거룩함을 지켜낸다”(De Cath. Ecclesiae unitate, 6). 마찬가지로 거룩한 치명자 치쁘리아누스는 훌륭한 이성으로, “신성한 기반으로부터 비롯되고 천상 성사들과 더불어 엮여 있는 교회 안의 이 일치가 상반되는 의지의 힘으로 갈갈이 찢겨지고 헤질 수 있다”(Ibid.)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두고 심히 놀랐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몸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이기에(코린토 전서 제12장 12절), 또 결속되고 적절히 연합되어 있기에(에페소서 4장 16절), 신비체가 분열되고 도처에 흩어진 지체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부적절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몸과 일치되어있지 않은 자는 그 지체가 아니요, 그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친교 안에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이 하나된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도 베드로와 그 적법한 후계자들의 권위와 수위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며 순종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지금에 포티오스와 종교개혁가들의 오류에 얽매여 있는 자들의 조상들은 영혼의 우두머리 목자 되는 로마의 주교께 순종하지 않았던가?[각주:4]

즉 비오 11세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종교가 어느정도는 선하다는 주장은 오류이며, 에큐메니즘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가 갈라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가시적인 교회는 결코 갈라질 수 없으며, 단지 그 하나인 교회에서, 베드로와 그 후계자의 권위 아래 있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교부들의 가르침이며, 또한 비오 11세의 전임자이신 교황 레오 13세와 후임자이신 교황 비오 12세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하다. 비오 11세 이전인 1896년, 레오 13세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따라서 이 신비체에 대하여서는, “대저 온 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에서 각각의 관절로써 맺어지고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며, 그 각각의 관절은 다시 각 지체의 분량에 상응하는 힘을 인하여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느니라”(에페소서 제4장 15-16절)라고 선언된다. 그러므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분리되어 흩어진 지체들은 같은 머리로서 하나로 일치될 수 없다. “천주께서는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도 한 분이시고, 당신 교회도 하나이며 신앙도 하나이고, 화합의 유대 안의 몸의 견고한 일치에 함께 참여한 백성도 하나다. 이 일치는 깨질 수 없으며, 구성된 일부분의 분리에 의해 하나인 몸이 분열되지도 않는다”(S. Cyprianus, De Cath. Eccl. Unitate, n. 23). 교회의 일치를 더욱 명백하게 제시하기 위해, 치쁘리아누스는 살아있는 몸의 예시를 사용한다. 몸의 지체는 몸과 일치되어있지 않고 또 몸으로부터 생명력을 끌어내지 않는 한 살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에서 분리된 지체는 필연적으로 죽어야만 한다. “지체가 분리되고 단절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부분으로 분열당할 수는 없다. 모체로부터 단절되어 나간 것은 떨어진 채로 살아갈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Ibid.)고 치쁘리아누스는 말하였다. …… 하여 그리스도인은 몸 안에서 사는 한 명의 천주교 신자이다. “몸으로부터 단절되면 이단자가 된다. 영혼의 생명은 절단된 지체에 따르지 않는다”(S. Augustinus, Sermo cclxvii., n. 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히 하나이고 동일하며, 그리스도의 의지와 명령으로부터 떠나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떠나 영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각주:5]

 

비오 11세 이후에는 비오 12세께서 이렇게 가르치셨다.

성경은 교회가 몸이라고 빈번히 주장한다. 바오로 종도는 “또한 그리스도는 그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콜로세서 제1장 18절)라고 말하였다. 교회가 하나의 몸이라면, 바오로가 “우리 모든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니”(로마서 제12장 5절)라고 했던 말에 따라 끊어지지 않는 일치여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가 끊어지지 않는 일치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감각적으로 뚜렷하고 또 지각할 수 있는 무엇이여야 한다. 복되이 기억되실 본인의 선임자인 레오 13세께서 회칙 Satis Cognitum에서 단언하신 바와 같이 말이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가시적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비가시적이자 무형인, 그저 “성신론적인” 무언가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또 말하는 바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비록 신앙 고백에 있어서 서로 다를지라도 무형의 결합 안에서 일치한다고 하니, 신성한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각주:6]

 

즉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가톨릭교회의 최고 목자가 교회 전체를 향하여 가르치는 일관된 교리이다.

 

자,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가르치는지와 대조해보자.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종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 Ecclesia catholica)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 교회의 요소들이 가톨릭교회의 조직 “밖에서도”(extra)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공동체인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이 땅 위에 가시적인 구조로 세우시고 끊임없이 지탱하여 주시며, 교회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은총을 널리 베푸신다.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훌륭한 유비로 교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비겨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받아들이신 본성도 구원의 생명체로서 말씀과 떨어질 수 없도록 결합되어 말씀에 봉사하듯이,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교회의 사회적 조직도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봉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에페 4,16 참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며,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목을 맡기셨고(요한 21,17 참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교회의 전파와 통치를 위임하셨으며(마태 28,18 이하 참조), 교회를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1티모 3,15 참조).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그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가 발견되지만, 그 요소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고유한 선물로서 보편적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각주: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같은 날 또한 아예 에큐메니즘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을 마련했다. 이 문헌은 교회에 “분열이 생겨났다”고 진술하고, 영세했으나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을 천주교인들이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이들로 인정하며 또 천주 성신의 은사와 은총이 “가톨릭 교회의 눈에 보이는 울타리 밖에도” 있을 수 있고, 어떤 분파와 이단(본문에서는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칭함)은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며”, 천주 성신께서 그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 …… 에큐메니즘 운동은 바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 자체를 세우고 교회에 생명을 주는 요소나 보화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 오히려 탁월한 많은 것들이 가톨릭 교회의 눈에 보이는 울타리 밖에도 있을 수 있다. 곧 기록된 하느님 말씀, 은총의 생활, 믿음, 바람, 사랑, 성령의 다른 내적 선물과 가시적 요소들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께 모이는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귀속된다.

그리스도교의 적지 않은 거룩한 행위들도 우리와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교회나 공동체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는 이 행위들은 의심 없이 은총의 생명을 실제로 낳아 줄 수 있으며, 또한 이 행위들이 구원의 친교로 들어서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각주:8]

 

반면 과거 교황 비오 8세께서는 성 예로니무스를 인용하여 교회 바깥에서 어린양을 먹는 자는 멸망하리라고 가르치셨다. (어린양은 전통적으로 성체성사를 가리키는 유구한 표현이다.)

이러한 이단들 중에는 이 시대 궤변론자들의 역겨운 어거지가 속하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신앙 고백들 가운데 어떠한 차이도 인정하지 않으며, 어느 종교에 속하였든지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 종교 간에 차이가 없다 여기는 이 실로 치명적인 개념은 자연적인 이성에 비추어서도 거부된다. 다양한 종교들이 종종 서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은 이 사실을 장담한다. 이 노련한 궤변론자들에게 맞서 사람들은 가톨릭 신앙 고백이 유일하게 참되다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종도가 “한 주시요 한 신앙이며 한 성세 있을 뿐이니라”(에페소서 제4장 5절) 하고 선포하듯이 말이다. 예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이 집 밖에서 어린양을 먹는 자는 홍수 때 노아와 함께 방주에 타지 않았던 자들처럼 멸망할 것이다”(Epistle to Damasus, the 37th pope). “믿고 세를 받는 자는 구령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죄로 판단함을 받으리라”(말구 복음[각주:9] 제16장 16절).[각주:10]

 

이밖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10월 28일 반포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라고 밝히는데[각주:11], 상기하였듯 비오 11세께서는 Mortalium Animos에서 “모든 종교가 다소간에 선하고 찬사받을만 하다고 여기는 그릇된 의견에 기초하고 있는 그러한 시도들을, 확실하게도 천주교인들은 결코 승인할 수 없다”라고 가르치셨다.


같은 해 12월 7일, 공의회는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에서 “인간이 종교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했다. “곧 종교 문제에서 자기의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아야 하고, 또한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혼자서나 단체로, 정당한 범위 안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각주:12] 「인간 존엄성」은 해당 대목의 각주로 1963년 교황 론칼리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제시하는데, 본 회칙에서 론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올바른 양심의 명령에 따라 신을 공경할 권리가 있는데, 바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신께 대한 예배를 드릴 권리입니다”[각주:13]

 

기실 이 권리에 대해서는 지난 시대의 교황들께서 너무나도 명확하게 반대하셨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이 종교 자유주의를 “불합리한”(absurda) “오류의 견해”(erronea sententia)라고 지칭하셨다.

이제 본인은 현재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또 다른 풍부한 원천을 고려하는 바, 바로 무차별주의이다. 도덕성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어떤 종교를 고백하든간에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경한 자들의 사기로 말미암아 이 비뚤어진 의견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 이 수치스러운 무차별주의의 그릇은 불합리한 오류의 견해를 낳으니, 곧 모든 이를 위한 양심의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것이다. 그 명제가 聖과 俗의 문제에 파멸을 확산시킴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명제가 종교에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가장 큰 뻔뻔함을 거듭해서 반복한다.[각주:14]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전임자의 교리를 계승하시어, 종교 자유주의가 “가톨릭교회와 영혼들의 구원에 극도로 치명적인 오류의 의견”(erroneam illam opinionem Catholicae Ecclesiae animarumque saluti maxime exitialem)이자 “망상”(deliramentum)이라고 가르치셨다.

사회 통치에 대한 완전히 거짓된 관념에서, 저들은 가톨릭교회와 영혼들의 구원에 지극히 치명적인 오류의 의견을 증진하길 두려워하지 않으니, 복되이 기억되실 본인의 전임자 그레고리오 16세께서 “망상”이라고 칭하신 바로 그것이다. 즉, ‘양심과 경배의 자유는 각 사람의 개인적 권리이며, 정당하게 구성된 모든 사회에서 적법하게 선언되고 단언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는 완전한 자유를 위하여 시민들에게 있는 권리이다. 교회든 민간이든, 어떠한 권위도 이를 저해하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민들은 육성으로, 언론으로, 여타의 방법으로 자신의 관념을 무엇이든지 공개적으로 또 공공연히 드러내고 선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각주:15]

 

그런데 이제 론칼리와 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의 가톨릭 교리에 따라 “불합리한 오류의 견해”, “가톨릭교회와 영혼들의 구원에 지극히 치명적인 오류의 의견”, “망상”인 그것, 인간에게 진리가 아니라 오류를 믿을 권리가 있고, 그것을 공공연히 공언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주의를 선언하는 것이다.

 

 

교리가 바뀔 수 있는가?

 

이러한 교황들의 가르침은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무류성이 적용된 것은 아니나, 교리로서의 지위, 즉 무류한 교의에 대한 교회의 이해라는 지위를 분명히 갖는다. 예컨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무류한 교의적 명제를 두고, 20세기 초 레너드 피니 신부(Fr. Leonard Feeney)는 이것이 오로지 성세성사를 통해 가톨릭교회와 일치한 이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가톨릭교회와 일치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모조리 지옥에 떨어진다고 이해하고 또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청 검사성성은 1949년 8월 8일 서신을 발표하여 “이 교의는 교회가 스스로 이해한 의미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검사성성은 여러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상기한 비오 12세의 Mystici Corporis에서 “ 무의식적인 열망과 갈망으로 구속주의 신비체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각주:16] 이들에 관한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성세성사를 받길 원하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열망에 따라 구원의 은총을 받아 가톨릭교회와 일치할 수 있음, 즉 화세(baptism of desire) 교리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피니 신부는 파문당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교리는 분명 올바른 이성의 추론을 통해 발전할 수 있지만, 이전의 교리와 모순될 수는 없다. 즉 리가 실질적으로 변화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다만 신앙이 이성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비를 계시하시고 신앙을 불어 넣으시는 바로 그 천주께서 인간의 영혼에 이성의 빛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진정한 불화가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이 천주께서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도 없고, 진리가 진리와 모순될 수도 없다. 다만 이러한 모순의 헛된 양상은 주로 신앙의 교의가 교회의 정신에 따라 이해되고 해석되지 아니하였거나, 삿된 의견이 이성의 결정으로 간주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비추어진 진리에 반하는 모든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정의한다”(제5차 라테란 공의회).

또한, 가르치는 종도적 의무와 함께 신앙의 유산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교회는 천주의 섭리로부터 “아무도 세속의 지혜와 허무한 궤변으로써 너희를 속이지 않도록”(콜로새 제2장 8절) “허명무실의 소위 인식이란 것”(티모테오 전 제6장 20절)을 금지할 권리와 의무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나, 특히 교회가 단죄한 것이라면, 그러한 종류의 의견을 학문의 정당한 결론으로 옹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하여 삿된 양상을 보여주는 오류로 간주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은 결코 서로 상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상호 도움을 준다. 올바른 추론이 신앙의 근거를 증명하고 그 빛에 비추어 천상 것들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하여주는 동시에 신앙은 이성을 오류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며 다방면의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천주께서 계시하신 신앙의 교리는 인간 정신이 완성하도록 철학적 창안물로 전승되어진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보호하고 무류하게 해석하도록 그리스도의 정배에게 천상 유산으로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모이신 성 교회가 한 번 선언한 거룩한 교의에 대한 이해는 영구히 유지되어야 하며, 더 깊은 이해라는 미명 아래 그 의미에서 퇴보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 개인의 이해, 지식, 지혜가 모든 사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그것이 교회 전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세기가 나아감에 따라 강하게 성장하고 진보하되, 오로지 그 자체의 유(類), 즉 같은 교의 안에서 같은 지각과 같은 이해로만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Vincent of Lerins, Commonitorium (Notebook), 28 (PL 50, 668)).[각주:17]

 

그 옛날 그리스도의 대리자들과 교부들의 일관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는 가톨릭교회이고,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분파자와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그들이 은총과 상관이 없고 구원에 있어서도 무가치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하고, 그 요소는 가톨릭교회 바깥의 분파자와 이단자들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은총을 발할 수 있고 또 구원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둘의 의미는 전혀 같지 않으며, 전자에서 후자를 올바르게 추론할 수도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에큐메니즘은 피니즘(Feeneyism)만큼이나, 본래의 교리와 같은 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런 오류들을 그 어떤 교부도 끝까지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모두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참담하다. 어떤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공의회가 진행되는 과정 및 공의회 문헌들에서 나타난 오류들을 두고 당혹스러움을 느끼거나 회의를 품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교황의 인가 아래 이루어진 일이므로 잠자코 순명하자는 마음으로 넘어갔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강도 공의회”로 간주된 단성론자 디오스코루스의 에페소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사성을 짚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경우에는 교황이 참석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교황이 이 공의회를 오류와 이단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무류성을 스스로 거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교황이 개입을 못한 강도 공의회와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론칼리와 몬티니는 교황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신속하게 주류가 된 활동적인 비주류 자유주의자들이 공의회 안에서 사용한 방법론에 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앞선 선례를 찾아보는 것이 이롭겠다. 이런 측면에서 교황 성 레오 1세께서 후일 “에페소 강도 공의회”라 이름 붙이신 주후 449년의 에페소 보편 공의회를 언급해야 한다. 이 공의회는 야망 있고 악랄한 주교 디오스코루스가 주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수사들과 제국 병사들의 도움으로 공의회 교부들에게 듣도 보도 못한 압력을 가했다. 교황 특사들이 의장직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교황의 서한도 읽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이지 않았던 이 공의회는 단성론의 오류를 고수했던 이단자 에우티케스가 정통이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교황들(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이 참석했다는 차이만 빼면 제2차 바티칸도 마찬가지로 강도 공의회였다. 교황들은 자유주의자들의 기습 공격에 저항하기는 커녕 아주 최소한의 반대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사업에 호의를 보이기나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 공의회는 교의적이지 않으며 사목적이라고 선포하고 쇄신과 에큐메니즘에 강세를 두면서, 이 교황들은 모든 오류로부터 보호해주었던 무류성의 카리스마를 당초부터 공의회와 스스로에게서 박탈했다.[각주:18]

 

그렇게 교황의 직무 유기에 의하여 교리가 변질당했다. 그리고 이제 그 변질이 더 많은 영향을 미쳐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톨릭교회의 오랜 격언은 “lex orandi, lex credendi”라 말해왔다.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이라는 뜻이다. 기도는 믿음을 반영한다. 기도를 바꾼다면, 믿음도 바뀐다.

 

그렇다. 이제 손봐야할 것은 다름 아닌 미사 전례가 되었다.

 


 

 

 

 

 

 

 

 

 

  1. Pope Paul VI, Encyclical Ecclesiam Suam, 64-66. [본문으로]
  2. Joseph Clifford Fenton, Journal of the Sixteenth, Seventeenth, Eighteenth and Nineteenth trips to Rome, March 1962-February 1963. [본문으로]
  3. Joseph Clifford Fenton, Journal of Trip to Rome, 1963-1965. [본문으로]
  4. Pope Pius XI, Encyclical Mortalium Animos, 2; 4; 10-11. [본문으로]
  5. Pope Leo XIII, Encyclical Satis Cognitum, 4. [본문으로]
  6. Pope Pius XII, Encyclical Mystici Corporis Christi, 14. [본문으로]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 [본문으로]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3항. [본문으로]
  9. 마르코 복음서. [본문으로]
  10. Pope Pius VIII, Encyclical Traditi Humilitati, 4. [본문으로]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우리 시대」(Nostra Aetate), 2항. [본문으로]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2항. [본문으로]
  13. 교황 요한 23세,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4항. [본문으로]
  14. Pope Gregory XVI, Encyclical Mirari Vos, 13-14. [본문으로]
  15. Pope Pius IX, Encyclical Quanta Cura, 3. [본문으로]
  16. Pope Pius XII, Encyclical Mystici Corporis Christi, 103. [본문으로]
  17. First Vatican Council, Dogmatic Constitution Dei Filius, chapter. 4. [본문으로]
  18. Marcel Lefebvre, They Have Uncrowned Him [Angelus Press, 1994], chapter XXIV.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