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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천주교인이오?” I. 공의회 이전의 근대주의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그 리 스 도 오 상 회



I
공의회 이전의 근대주의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이해하고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의회 이전의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디 가톨릭교회는 인간이 이성적 추론을 통해 제1원인, 즉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신 천주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성의 추론으로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진리(예컨대 삼위일체와 같은 진리)에 대해서는, 천주께서 직접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신 신성한 묵시(divine revelation)를 믿음으로 알 수 있다. 교회는 성신의 도우심으로 시대에 걸쳐 이 묵시의 진리를 언제나 동일한 의미와 본질을 보존하여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정의한다. 모든 신자들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이 진리를 믿고 동의해야 한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항구한 가르침이다. 이와같이 신앙이란 천주께로부터 직접 받아 들음으로써 갖게 되는 객관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다. 

그런고로 신앙은 설교를 들음에서 생기고, 설교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되는 것이니라. (로마서 제10장 17절)

 

그러나 19-20세기에 접어 들면서, 가톨릭교회 안에는 근대주의(modernism) 사상을 펼치는 신학자들이 등장했다. 성경과 전통을 당시의 역사 비평과 철학적, 정치적 발전에 맞추어 재해석해야 된다는 사상이었다. 근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천주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 내지 신앙주의(fideism)를 지지했다. 인간은 객관적 진리를 알 수 없고, 오로지 주관적인 이해와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천주께서 존재하시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믿을 뿐이다. 천주교가 참된 종교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믿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신성한 묵시라는 개념 또한 부정된다. 근대주의 관점에서, 교리는 천주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전달받아 교회가 그 일관된 의미를 보존하여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교리는 인간의 종교적 감수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에 지나지 않기에, 시대와 장소, 역사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고 다른 표현으로도 나타내어질 수 있게 된다. 모든 종교와 교리는 다 그러한 종교적 감수성의 표현이므로, 무엇이 진리고 오류냐 할 게 더는 없는 것이다.

 

 

근대주의에 대한 단죄

 

가톨릭 신앙에 대한 근대주의자들의 전제는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교황 비오 9세의 장엄교도권에 따라 단죄되었다.[각주:1] [각주:2] 그럼에도 근대주의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시대에 되어서 더욱 횡행했기 때문에, 성 비오 10세께서는 본격적으로 교회 내부의 근대주의자들을 파문하고 근대주의 그 자체를 단죄하셨다. 특별히 1907년에는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를 통하여, 근대주의는 “모든 이단의 종합”(omnium haereseon conlectum)[각주:3]이라고 단언하셨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근대주의자들은 신앙의 진리라는 것이 천주께로부터 받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인 감수성, 양심에서 피어난 주관적인 것이므로, 교의는 시대에 따라 진일보해야 할 것이요 교회는 개인의 양심과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민주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권위란 그 기원을 교회와 같이 종교적 양심에 두고 있으며, 그렇기에 권위는 종교적 양심에 종속된다고 한다. 권위가 이러한 의존성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독재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인류의 양심 안에 내적 갈등을 유발하고 조장하길 원치 않는다면, 교회 권위는 민주적인 형태를 갖추어야 된다고 한다. …… 결론적으로 근대주의자들의 크나큰 열망 하나는, 교회 권위와 신자들의 자유 간 협조의 길을 찾는 것이다.[각주:4]
그리하여 근대주의자들에 따르면 종교적인 공식이 절대적인 진리를 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징인 한 진리의 모상일 뿐이기에, 반드시 종교적인 감정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종교적인 감정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적인 감정의 객체는 절대성을 아우르므로, 무한히 다양한 양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 이제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게 된다. …… 우리가 교의라고 부르는 공식들도 이러한 변화에 종속되어야만 하므로, 변화할 공산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의의 실질적인 진일보의 길이 열려있다고 하니, 이러한 궤변의 무시무시한 무리가 모든 종교를 파멸하고 파괴한다. 교의는 진일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일보하여야 한다라. 근대주의자들은 이것을 강하게 단언하며, 명백히 그들의 원칙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각주:5]

 

성 비오 10세의 분석과 폭로가 너무나 명쾌했다. 이후 근대주의에 가담한 신학자들은 모두 파문되거나 적절한 징계를 받았다. 거기다가 1910년, 성 비오 10세는 모든 성직자와 수도회 장상, 신학자들이 올바른 가톨릭 정신을 고백하고 근대주의의 정신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反근대주의 선서’(Oath Against Modernism)를 하도록 명하셨다.

 

이제 근대주의는 더 이상 교회에 발붙일 곳이 없어보였다. 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성 비오 10세께서 남기신 경고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품과 심장 안에 깊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오류의 추종자들이 교회의 공공연한 원수들 가운데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지체하지 않고 특별히 제시해야만 하는 바, 깊이 개탄스럽고 두려운 일이니, 저들은 교회의 품과 심장 안에 깊이 숨어있으며 해롭기는 더 해로워도 눈에 띄기는 더욱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6]

 

근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심층부에 숨어있기에, 교회의 단죄와 억압 아래 잠시 자취를 감췄더라도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근대주의가 공공연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하더라도, 신학교에 침투하여 조용히 신학생과 신자들을 전염시키며 물밑 작업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 지나지 않아, 교회에는 새로운 신학 사조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교회의 근대화를 추구한 新근대주의

 

초자연적인 것이라고는 무엇이든 부정하는 무신론과 유물론, 기적이라고는 신화나 우화 취급하는 과학만능주의, 진리뿐만 아니라 오류에도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었던 자유주의와 반성직주의,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려는 근대의 이념들이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던 이 시기에, 가톨릭교회는 천주교 신학에 침투한 근대주의를 치유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 체계를 더욱 장려했다.

한편, 스콜라 신학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 20세기 초중반의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저작 등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으로 회귀”(ressourcement)를 주장하며 새로운 신학 사조를 형성해갔다. 이 신학 사조는 말 그대로 새로운 신학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라고 불리웠다. 이들은 또한 신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통 스콜라 신학에 의존하지 않고, 교리적 설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근대의 여러 이념들을 수용하여 신앙을 재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 회칙 Humani Generis에서 이러한 시도를 경계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에 있어서 교의의 의미를 최소한으로 축소하길 원하며, 교의 자체를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수립된 용어들 및 가톨릭 교사들이 고집했던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키길 원하고,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성경과 교회 교부들이 사용했던 문체로 되돌리길 원한다. 그들은 신성한 묵시에 있어서 외부적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이 교의에서 벗겨질 때, 교의가 교회의 일치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의 교리적인 의견들에 안성맞춤으로 필적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이 천주교의 교의와 반대자들의 신조 사이 상호 흡수에 서서히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다.

더욱이, 그들은 천주교 교리가 그러한 상태로 축소되었을 때, 교의가 현대 철학 및 내재론과 관념론, 실존주의나 기타 체계의 개념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을 허락할, 현대적인 필요를 만족시킬 방식을 찾게 되리라고 주장한다. …… 불행하게도 이러한 새로움의 옹호자들은 스콜라 신학을 경멸하는 일에서, 스콜라 신학을 권위 있게 승인한 교회 자신의 가르치는 권위를 등한시하고 멸시하기까지 하는 일로 쉽사리 넘어가 버린다.[각주:7]

 

대관절 전통적인 스콜라 신학과 누벨 테올로지의 방식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 20세기 대표적인 누벨 테올로지 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카를 라너 신부는, 전통적인 신학 사조를 비판하고 새로운 신학 사조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신학은 …… 많디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고, 개념을 밝히기 위해 매우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하며, 모든 선포들의 모호함을 자각하고 있다. 어떠한 오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결정적 선언으로 하나의 현실이나 가정된 오류를 반박하는 일은, 전에도 그랬듯이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 우리는 상황을 냉정하고 명확하게 고려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교회와 교회의 교도권이 처신하는 데에 있어 무엇이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방법인지 물을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체계 및 과학적 신학 용어들과, 어마어마한 수의 신학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신학자 한 사람은 그것들 앞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신학자들의 논문은 더 이상 모두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이해되고 고정된 방식으로 진술된 전통적인 방법 안에서 제시된 교리를 두고 ‘그렇다’ ‘아니다’로 답할 수 없다

오늘날 신학자들의 논문 대부분은 철학, 비종교적 개념, 이념적 문제들과 더불어 ‘대화’ 안에서 진술하는데,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완전히 다르고 그 다원성은 신학자 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 …… 질의와 용어의 영역에서 모든 신학자들에게 동등한 접근이 용이한, 절대적으로 동질적인 신학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군소 종파의 신학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런 것은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세상에 대고 연설할 수 없다.[각주:8]

 

신학 바깥의 이념들과 “대화”하는 신학의 다원성을 옹호하며, 동일하고 고정된 전통적인 신학에는 더 이상 “그렇다” “아니다”로 답할 수도 없고, 세상에게도 선언할 수 없는 채로 교회를 “군소 종파”로 전락시킨다라…. 이러한 누벨 테올로지의 정신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희 말은 그런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할지니, 대개 이에서 더 보태는 것은 악에서조차 오는 것이니라. (마테오 복음 제5장 37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누벨 테올로지가 교회에 끼친 영향을 보고 들은 전통주의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경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관련 교수나 학자들을 언급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현재 가톨릭 대학 전부가, 또는 거의 전부가 더 이상 정통 천주교 신앙을 가르치지 않음이 이제는 꽤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곳을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남미에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신학 연구를 구실 삼아 우리 신앙에 모순되는 의견들을 내놓는 몇몇 교수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 나는 이미 스트라스부르 신학부 학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그는 우리가 집단 그 자체에서 드러날 성체를 내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그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책 「성체 신앙에 대한 현시대의 사고와 표현」(Contemporary Thought and Expression of Eucharistic Faith)을 보면 …… 성체성사를 ‘효험적인 표지’라고 부르는 것을 조롱합니다. 그는 “이는 우스꽝스럽다”며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유형의 말을 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 그것은 헛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교수들에다가 심지어 학부 학장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젊은 학생들 및 수업에 참석하는 신학생들은 서서히 오류에 감염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가톨릭적이지 않은 교육을 받습니다. 얼마 전 프리부르의 도미니코회 교수가 혼전 성관계는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며 장담하는 것을 들었던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배우는 신학생들은 새로운 버전의 미사 전문(canon of Mass)을 작성하라고 가르친 또 다른 도미니코회원을 알고 있었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사제가 되었을 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라고 했더랍니다. 다음과 같은 예시도 계속해서 들 수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신학부의 스멀더즈(Smulders)는 성 바오로와 성 요한이 예수께서 천주의 아들이시라는 개념을 “지어냈다”는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강생에 대한 교의를 거부합니다. 네이메헌 가톨릭 대학의 스힐레베이크스는 매우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그는 교의(실체변화)를 역사의 한 시기적 조건으로 치부하며 ‘의미변화’(transsignification)를 지어냈습니다.[각주:9]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한 사제의 축성으로 인해,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남으나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물리적이고 살아있는 몸과 피로, 즉 성체와 성혈로 변화하여, 몸과 피뿐만 아니라 영혼과 천주성까지 실제적으로 온전히 현존하신다는 실체변화 교리는, 천주교 신자들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신앙이다. 그러나 에드바르트 스힐레베이크스 신부가 고안해낸 의미변화란,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 자체로 변한 게 아닌, 그저 ‘먹고 마시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의미로 현상학적으로 변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무릇 좋은 나무는 좋은 실과를 맺고, 언짢은 나무는 언짢은 실과를 맺나니라. …… 이러므로 그 실과를 보고 저들을 알라”(마테오 복음 제7장 17-20절)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스힐레베이크스는 1980년에 그의 저서 「성직 변화의 사례」에서,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경우에 따라 평신도들이 성체를 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 교황청으로부터 교정을 받았다. 하기야 변화하는 게 실체가 아니라 의미라면 뭣하러 사제가 축성을 해야 하겠는가?

 

르페브르 대주교는 유명한 한스 큉도 언급한다.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한스 큉은 교의인 교황 무류성을 비판하는 「무류성이라니?」(Infallible?)이라는 책까지 내었다가 1979년에 신앙교리성으로부터 신학을 가르칠 권한을 박탈당한 공공연한 이단자이지만, 파문도 당하지 않았고 여전히 교수직을 유지했다.

튀빙겐의 큉은 가톨릭 신학 교수직에서 가르치는 권한을 박탈당하기 전, 복된 삼위일체, 동정 마리아, 성사의 신비들에 의문을 제기했고, 예수를 “어떠한 신학적 교육도” 받지 않은 대중적인 스토리텔러로 묘사했습니다. ……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끄는 新근대주의의 대변인들에게 하늘에 닿을 정도의 찬사를 받습니다. 이들의 이론이 대중의 시각에 중요하게 다가가며 그 명성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식으로, 이들은 언론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교회가 변화했다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이들은 가벼운 제재에 가끔씩 방해를 받으면서, 수년 동안 체제 전복적인 가르침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각주:10]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러한 새로운 신학 사조를 새로운 근대주의라는 뜻의 “新근대주의”(neo-modernism)라고 불렀다. 新근대주의 신학자들이 언론에 의해 찬사를 받는다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처럼, 큉이 사망했을 당시, 한국 천주교 공식 언론인 가톨릭평화신문은 “세계적인 가톨릭 신학자”가 “선종”(善終), 즉 선하게 살다가 복된 죽음을 맞이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이 新근대주의 신학자들은, 대놓고 오류를 주장해도 교회로부터 가벼운 제재밖에 받지 않는 데다 신자들에게는 세계적인 신학자인양 찬사를 받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펴내며 교회의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어왔다. 교회에 의해 단죄당한 근대주의가, 新근대주의로 다시 태어나 교회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일어난 사태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잠시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저 新근대주의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심각하다는 건 알만하다. 그런데 인용하는 내용들은 모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일들이지 않은가?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전을 짚어 보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누군가가 이렇게 지적한다면, 타당하다 하겠다. 이들이 저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주로 공의회 이후에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을 인용한 이유는, 바로 이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자문위원 신학자로 활동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교황”의 등장

 

이상하지 않은가?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교회는 근대주의자들에게 극구 반대하며 그들을 단죄하고 파문하지 않았는가? 교황이 나서서 그들의 오류를 면밀히 분석하여 하나 하나 논박하지 않았는가? 교회가 계속하여 그들을 경계했다면, 근대주의는 그 옛날의 아리우스주의처럼 자연히 사라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토록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과거로 돌아가 보자. 1958년 10월 9일, 新근대주의자들을 지탄했던 교황 비오 12께서 선종하셨다. 10월 25일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10월 28일, 11번의 투표 끝에 콘클라베는 새 교황의 선출을 알렸다. 교황으로 선출된 자는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었으며, ‘교황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베드로좌에 올랐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문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할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좋은 교황”(il papa buono)이라 불릴 인물이었다.

 

하지만 론칼리가 과연 정말로 좋은 교황이었을까? 그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과거 행보를 살펴야 한다. 1925년, 갓 주교로 서품된 론칼리는 불가리아로 파견됐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동방 정교회를 신봉하는 그곳에서, 론칼리는 1926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천주교인들과 정교인들은 원수 지간이 아니라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같은 성사들, 특별히 성체성사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헌법에 관한 일부 의견 불일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의 원인이 된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에 사망했습니다. 오래된 논쟁을 버립시다. 각자의 영역에서 우리 형제들에게 선한 모범을 보여 주어, 그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노력합시다. 나중에는 다른 길을 따라 여정을 떠나더라도,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 일치를 이루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유일한 교회를 함께 형성할 것입니다.[각주:11]

 

오늘날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은 론칼리의 이 발언에 의아함을 느끼지 못한다. 다들 사제로부터 “천주교와 동방 정교회는 교리가 같으나 다만 조직 상으로만 분리되어 있다”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들은 이 말을 철썩 같이 믿고서, “동방 정교회는 천주교와 같이 종도적인 전통을 이어오는 교회”라고 생각하여 그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기도 한다.

 

이것이 단순히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방 정교회는 가톨릭교회의 무류한 가르침들, 예컨대 교황 수위권과 교황 무류성, 연옥, 그리고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신다는 ‘필리오퀘’(filioque) 교리를 믿지 않는다. 정교인들은 교황을 수많은 주교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연옥을 믿지 않으며, 성신은 오로지 성부로부터만 발하신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단이며, 결코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동방 정교회의 이러한 이단적 아이디어는 9세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포티오스는 어떻게 총대주교직에 올랐나? 비잔틴 황제의 섭정이었던 바르다스가 아내를 버리고 며느리와 근친상간을 저지르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성 이냐시우스는 미사 중에 바르다스에게 성체 분배를 거부하고 그를 규탄했다. 이에 바르다스는 정치적 권력을 동원하여 이냐시우스를 추방했다. 그렇게 새로이 총대주교직에 오른 것이 포티오스였다.

 

이에 이냐시우스는 교황 성 니콜라오 1세께 부당함을 호소했고, 니콜라오 1세는 863년 라테라노 시노드를 소집하시어, 사임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할 것을 포티오스에게 선언하셨다. 포티오스는 강하게 반발하며, 필리오퀘 교리를 걸고 넘어지며 적반하장으로 교황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이렇게 발생한 ‘포티오스 분파’(Photian Schism)는 그대로 동방 교회가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훗날 동방 정교회를 형성하게 했다.​

 

동방 정교회는 뿌리부터 이토록 더럽고 추한 것이다. 그런데 관련자들이 모두 죽었으니 “오래된 논쟁”을 버리자라…. 우리는 한 때 포티오스를 단죄하는, 진리에 충실한 교황이 있었다. 이제는 포티오스에게 “오래된 논쟁을 버립시다”라고 말하는 교황을 얻게 될 것이다.

 

 

공의회에 근대주의자들을 환영하다

 

교황에 오른지 몇 년 되지 않은 론칼리는, 1962년에 정말이지 갑작스럽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는 이전에 언급했던 카를 라너, 에드바르트 스힐레베이크스, 한스 큉 과 같은 이들 외에도,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 요제프 라칭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같은 수많은 新근대주의자들이 공의회의 자문위원 신학자로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들은 모두 당시 교황청으로부터 경고나 징계를 받거나, 심지어는 “검사성성으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은 적이 있는”(suspecté naguère par le Saint-Office) 인물들이었다!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 “카를 라너”, “요제프 라칭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검사성성으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은 적 있음”(suspecté naguère par le Saint-Office).

 

근대주의가 등장한 이후로, 교황들은 모두 근대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규탄하고, 단죄하며, 천주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을 교회에서 뿌리 뽑고자 애썼다. 이제는 천주교인과 이단자들이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교황이 나타났다. 그는 근대주의자들이 공의회에서 활개를 칠 수 있게끔 그들을 환영했다.

 

공의회가 개막된 바로 그 다음 해인 1963년 6월 3일, 론칼리는 사망했다. 이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어, 론칼리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강도 공의회였음을, 공의회 스스로가 결코 숨기지 않을 것이다.

 


 

  1. “만일 누구라도 천주께서 지으신 것들로 인하여,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창조주이며 주님 되시는 한 분 참 천주를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First Vatican Council, Dogmatic Constitution Dei Filius, can. I, 1) [본문으로]
  2. “만일 누구라도 신성한 묵시는 외적인 표지에 따라 신뢰할만한 것이 될 수 없기에, 사람은 오로지 개인적이고 내적인 경험이나 사적인 감화로 말미암아 신앙에 이끌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Ibid., can. III, 3) [본문으로]
  3. Pope St. Pius X, Encyclical Pascendi Dominici Gregis, 39. [본문으로]
  4. Ibid., 13. [본문으로]
  5. Ibid., 23. [본문으로]
  6. Ibid., 2. [본문으로]
  7. Pope Pius XII, Encyclical Humanis Generis, 14-15. [본문으로]
  8. Karl Rahner, Magistero e Teologia dopo il Concilio [Brescia: Queriniana, 1967], pp. 32-33. [본문으로]
  9. Marcel Lefebvre, Open Letter to Confused Catholics, ch. 9. [본문으로]
  10. Ibid., ch. 9. [본문으로]
  11. Luigi Accattoli, When A Pope Asks Forgiveness [New York: Alba House and Daughters of St. Paul, 1998], pp. 18-19. [본문으로]